로잔 운동의 ‘핵심 브레인’ 존 스토트의 신학

2024.05.14  안승오 교수

1. 로잔 운동의 핵심 브레인 존 스토트

복음주의 진영의 가장 대표적인 운동인 로잔운동은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존 스토트(John Stott) 두 거장에 의해 태동됐다고 할 수 있다.


좀 단순화해서 표현하자면 빌리 그래함은 로잔 운동의 하드웨어를, 존 스토트는 로잔 운동의 소프트웨어를 각각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빌리 그래함의 지도력에 의해 전 세계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모임이 형성되고 추진됐다면, 존 스토트의 노력에 의해 로잔 운동이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로잔 운동이 나가는 방향은 스토트에 의해 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토트의 가장 큰 공헌은 로잔 언약을 작성해 로잔 신학의 기초를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토트는 로잔 언약을 작성할 때, 양 방향으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로잔 운동이 복음의 우선성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책임도 복음전도와 똑같이 중요한 책임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전자의 입장이 빌리 그래함과 상당수 복음주의 참여자들의 입장이었다면, 후자의 입장은 남미 해방신학과 에큐메니칼 진영 ‘하나님의 선교’ 개념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책임도 똑같이 중요한 선교적 책임이라는 사고를 가진 르네 파딜라((Rene Padilla),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 비나이 사무엘(Vinay Samuel) 등 소위 ‘철저한 제자도 그룹’의 입장이었다.

2. 존 스토트 신학의 변화와 영향

존 스토트는 본래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입장을 가졌지만, 1968년 WCC 웁살라 총회에 참석하고 철저한 제자도 그룹과 함께한 여행 등에서 비서구 세계의 심각한 가난을 목격하면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됐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그동안 개인 구령에 초점을 맞추었던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사회적 책임 문제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스토트는 어느 한쪽의 생각만 택하기보다, 모두를 포함하는 균형 잡힌 사고와 신학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복음전도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빌리 그래함과 결별하고 로잔 운동에서도 손을 뗄 각오로 로잔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로잔 언약은 전도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교회의 사회참여를 함께 강조하는 다소 어정쩡한 선교 개념을 지니게 됐다. 여기에는 스토트의 영향이 잘 나타나 있고, 이후에도 스토트의 이런 관점은 로잔 운동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3. 존 스토트 신학의 공헌점

그렇다면 로잔 운동에 미친 존 스토트의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먼저 그의 공헌을 생각해 보자. 첫째, 스토트는 복음주의 운동이 분열되지 않고 잘 모아지도록 하는 일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스토트가 어느 한쪽 손을 들었다면, 다른 쪽은 로잔 운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째, 스토트는 균형을 매우 중시하면서 복음주의 운동이 균형 잡힌 운동이 되도록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로잔이 추구하는 ‘총체적 선교’는 균형을 중시한 스토트의 노력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4. 존 스토트 신학의 한계점

하지만 스토트의 이런 공헌점과 강점은 동시에 한계점이 될 수도 있다. 그의 신학 가운데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필자가 보기에 스토트는 균형과 화합에 많은 강조점을 두면서 기여한 바가 있지만, 반면 균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균형이라는 프레임’에 빠진 것 같은 경향을 보인다. 그는 로잔 1차 대회 다음 해인 1975년 <균형 잡힌 기독교(Balanced Christianity)>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하나님은 우리 이웃을 육체 없는 영혼으로(이웃의 영혼만 사랑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으며, 영혼 없는 육체로(이웃의 육체적 행복에만 관심을 갖도록) 창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아가 사회로부터 분리된 영육으로(이웃 한 개인에게만 관심을 갖고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도록)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이며 육체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의 이웃을 사랑한다면, 이웃의 전적인 복지, 즉 그의 육체와 영혼과 사회적인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78-79쪽).”

5. 존 스토트 전제의 오류

존 스토트의 위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이고,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는데, 전통적인 선교는 인간의 육체적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을 무시했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스토트는 인간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을 주장하면서, 전통적 인간 이해가 균형을 잃은 왜곡된 견해라는 관점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선교 역사는 스토트의 관점에 오류가 있음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에 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조선에 와서 다른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했다면, 스토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병원과 고아원 등을 세워서 조선인들의 육체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앞장섰고, 학교 등을 세우고 교육을 하면서 조선의 정치와 사회 문화 등을 바꾸는 일에 기여했다.


다만 선교사들은 이 모든 도움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조선을 바꾸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선교 사명이라는 관점을 지녔기에, 구령 사역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존 스토트 신학의 심각한 한계점

더 심각한 것은 스토트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는 것 같으면서도, 어떤 부분에서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이 영적이고,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창조됐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가 어디에서 발생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영적 차원의 문제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선교를 수행할 때 교회는 어떤 문제 해결에 가장 큰 관심을 둬야 할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교회는 영적 차원의 문제 해결에 더 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우리 선교 모델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던가? 예수는 ‘떡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면서 왕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고 말씀하셨다.


만약 스토트의 주장대로라면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사시면서 백성들에게 매일 떡을 먹여주고 백성들의 원대로 왕이 되시어 이스라엘의 식민 통치를 종식시켜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백 번 양보하여 예수께서 실제로 왕이 되셨다 한들, 이스라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할 수 없다.


스토트의 문제는 균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균형 프레임에 매몰돼, 그만 성경 그리고 예수의 모범과 부합하지 않는 선교를 주장하면서 선교의 본질을 부차적인 것과 섞어 희석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균형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균형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본질을 약화시키는 균형은 결국 기독교 자체를 약화시킬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


로잔은 균형에 잡혀 본질을 약화시킨 스토트의 관점을 거의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로잔이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한 인간 신학자가 아니라 성경이요 예수님이 아닌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존 스토트 신학에 대한 문제 제기

출처 : http://blog.daum.net/trance/12928285
-존 스토트는 영혼 멸절설을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종교 다원론을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윤리신학을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신 복음주의자이다.


스토드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사용한 심상(불못과 바깥 어두운 데와 두 번째 죽음)이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불가능한데 불과 어둠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132쪽)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고통이라는 견해가 견딜 수 없게 느껴진다.(133쪽)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134쪽)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종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의 영원한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다(자유주의자와의 대화, 황영철, 여수룬)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비 성경적이며 성경에 나오는 지옥의 개념을 거부하기 위한 것으로서 이미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러한 영원 멸절설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다음은 한종희 목사님의 “김세윤의 신학”에 나오는 김교수의 신학 비판과 더불어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 있는 신복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에는 존 스토트 신부나, 우리가 보수주의 복음주의 거장으로 알고 있는 제임스 패커 등도 전통신학의 용어로 자신들의 신복음 주의 신학을 교묘히 포장하고 윤리신학을 그 속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 개념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하였다. 그러나 율법 개념과, 제자 개념은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율법 개념은 이 율법이 하나님의 율법임을 말하지만, 제자 개념은 그 교훈이 스승의 교훈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김 교수가 율법을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한 것은,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스승의 교훈으로 지키자고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도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제자의 개념 즉 스승의 교훈으로 지키자고 하였으니, 김 교수의 신학에서는 교훈을 주는 자가 하나님이 아니고, 스승이므로, 김 교수의 신학에는 스승만 있고, 하나님이 없다. 그러므로 김 교수는 율법을 스승의 교훈으로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으로는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물론 김 교수가 신학해설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 것이 있지만, 은유비유로서 말한 것이다. 은유비유에서 말한 하나님은 허구개념의 하나님이고, 관념의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나 보수신학(정통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거역하면 하나님이 형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두려움으로 순종한다. 다시 말해서, 정통신학에서는 하나님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한 대속(atonement)과 칭의(justification)로, 값없이 구원받은 자는, 지옥형벌을 벗어난 구원에 감격하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되, 순교하면서까지 지키기 때문에(창4:3-8; 계1:9; 6:9,11; 12:17; 14:12), 참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벗어나며, 성화를 입으며, 이웃을 사랑하여 화목한 삶을 산다. 기독교의 윤리는, 값없이 구원받은 자가 감격하여, 능히 맺히는 열매이다.


그러나 현대신학(진보신학)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리스도도 보통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율법도 스승이 제자에게 주는 교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도 스승이 주는 교훈으로 받기 때문에, 김 교수가 하나님의 율법으로 지키는 것을 꾸짖었고,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현대신학은 지옥과 천국을 불신하고, 대속과 칭의를 불신하기 때문에, 구원의 감격이 없으므로, 율법도 제자의 개념으로 지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바로 이것이 현대신학이자, 신복음주의 신학이다.


김 교수는 현대신학을 따르기 때문에, 성서의 교훈을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으로 지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꾸짖었다. 반대로 성서의 교훈을 제자도의 개념으로 지키자고 주장하였다. 김 교수는 예수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믿지 않고,9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행적과 됨됨이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구원으로 보았으니,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자 Albrecht Ritschle이 부르짖은 윤리신학이고, Kierkegaard를 따라 인간의 윤리회복(실존회복)을 부르짖은 Barth의 윤리신학이고, Bultmann, Brunner, Tillich, Niebuhr 형제 등이 외친 윤리신학이고, 미국의 Harold J Ockenga, Edward J. Carnell, Carl F H Henry 등이 외친 윤리신학이고, 영국의 John R. W. Stott와 James I. Packer가 외친 윤리신학이다. 필자가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를 밝히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이 이러한 내막을 밝히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보통 인간 예수로 구성되는 복음과 구원과 신학을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박에 없다. 즉 보통 인간 예수가, 가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의를 부르짖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여, 정의와 공의를 세우고, 인권을 신장하였으니,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를 스승으로 영접하고, 제자가 되어져, 예수님의 행적과 됨됨(품성)이에 동참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되찾으면, 인류사회는 지상천국을 이룰 것이라는 것이, 김 교수와 신복음주의 신학자들(B. Graham, Ockenga, Henry, Carnell, Stott, Packer)이 주장하는 제자도의 윤리복음과 윤리구원과, 윤리신학이다. 이 제자도의 신학은 모든 20세기 현대신학이 주장해왔고, WCC와 NCC와 NAE가 지지해왔다.


20세기의 윤리신학의 대 전제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1950년대의 예수를 보통 인간으로 보는 WCC, NCC, NAE가 대화 프로그램을 통하여, 종교통합을 시도해보았으나, 종교통합은 고사하고, 도리어 논쟁과 분쟁만을 조장함으로, 1990년대부터는 종교 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가 동등하고, 그 구원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로마 법황이 제2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면서 1965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고, John Stott 목사가 1992년에 책 “The Contemporary Christian”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고, Billy Graham 목사가 1997년에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신정통주의 신학의 정체, 한종희)


신정통주의 신학(1920-1950)은 상당히 알려져 있지만, 신복음주의 신학(1950-2000)의 정체(正體)는 거의 100% 은폐되어 있어,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신복음주의 신학의 正體가 왜 가려지고 은폐되어져 왔는가?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독자들이 그 이유를 알아야, 비로소 신복음주의 신학의 정체(正體)를 조금씩이나마 감지할 수가 있다. 다음은 그 이유들이다.


ⓐ 신복음주의 신학을 자타가 복음주의 신학, 개혁주의 신학, 보수주의 신학으로 호칭해왔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신학해설의 기법이나, 문장의 형식이 완전히 정통신학을 따랐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신학해설에서 용어들을 100%, 정통신학의 용어들만을 사용하였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정통신학을 절대로 정면에서 부정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 신복음주의 신학이, 자신의 신학적인 정체를 절대로 노골적으로 들어 내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신복음주의 신학이 완벽하게 가려지고 은폐되어져, 그 신학의 정체성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신학자들은, 그들의 기적불신이 의심받지 않았다. Billy Graham, John R. W. Stott, J. I. Packer, E. Carnell, Carl F. H. Henry, H. J. Ockenga, 김세윤 등. “


->근거 자료 :
1) 영혼멸절설->
자유주의자와의 대화/황영철 역, 여수룬 간/ 제 3권 132-141쪽/(1) ‘지옥이란 무엇인가?
2) 종교다원주의자 -> The Contemporary Christian/John Stott /1992,
3) 신복음주의자 ->
김세윤의 신학 <그리스도가 없는 신성과 내세가 없는 기독교> /한종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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