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양성학교 교사, 기전여학교 교사 등을 역임한 교육자.개신교인, 여성운동가.


1909년 황해도 황주읍 벽성리에서 방중일(方中日)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조부 방흥복(方興福)은 인근에 자선가로 알려져 있었다. 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었기에 어려서부터 황주읍교회에 출석하였고, 교회 부속 양성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921년 양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의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1923년 학생들의 ‘동맹휴학사건’으로 학교가 소요에 휩싸이자,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26년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26년 4월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사로서 3년간 사역한 후 정신적 공허감과 신앙적 갈증을 느껴 전주를 떠났다.


고향 황주읍으로 돌아온 방애인은 모교인 양성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와 기도생활, 부흥회에 참석하며 신앙적 탐구에 몰두하던 중 1930년 1월 10일 ‘신의 음성’을 듣는 종교 체험을 하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방애인은 철저한 신앙인이 되었고, 교사로서 사역에 대한 소명감도 투철해졌다. 전주 기전여학교의 요청으로 1931년 9월에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로 돌아온 방애인은 기전여학교 학생들로 기전신성회(紀全信聖會)를 조직해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하였고, 방과 후에 기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로 전도대를 조직해서 전주 시내로 나가 전도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전도 중 거리에서 만난 고아와 걸인,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전주 시민들은 그가 어린 고아를 업고 숙소로 가거나 다리 밑에서 한센병환자(나환자)의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고 하며 그에게 거리의 성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당시 전주에는 1927년 전주여자기독교청년회(YWCA)가 서문교회를 빌려 사용하던 작은 고아원이 있었는데, 시설이나 재정이 열악해서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다. 이에 방애인은 전주 서문교회 담임목사 배은희와 홍석호, 김선례 등 기전여학교 교사들과 함께 고아원 설립기금 모금운동에 나섰고, 1931년 12월 전주 서문교회와 인접한 윤락가에 기생집 한 채를 구입하여 고아원을 개원하였다.


이후 방애인은 기전여학교 사역과 고아원 사역을 겸하였는데, 과로로 건강이 나빠졌고, 가족 문제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결국 병약한 몸으로 1933년 여름방학을 고향에서 보내고 전주로 돌아온 직후인 9월 16일 24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전주 서문교회에서 엄수되었고, 묘소는 전주 외곽 효자동 공동묘지에 조성되었다가 1999년 완주군 비봉면 전주서문교회 묘지로 이장되었다. 1934년 배은희가 쓴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이 출간되면서 방애인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졌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방애인(方愛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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